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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호수보다 바다에서

by jrpark91 2026. 2. 8.

퇴근길 가게 상점에서 익숙한 댄스 음악이 들려온다. 현아의 버블 팝이다. 입대했을 당시에 나온 입대송인데 참 오랜만이다. 당시 워낙 인기가 많았었던지라 조교들이 훈련생들을 대강당에 집합시켜 뮤직비디오를 보여 주곤 했다. 한곳에 모여 다같이 "버블버블 팝팝!" 을 힘차게 외쳤었다. 몸은 힘들었지만 이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하루의 스트레스를 풀었었다. 그래서 이 노래를 들으면 앳된 훈련병 시절에 느꼈던 감정들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마치 지금의 '나'와 과거의 '나' 사이에 잠시 작은 감정의 통로가 생긴 것처럼 말이다. 시간을 거스르는 그 통로를 따라 앳된 훈련병이 내뿜는 긴장감, 피곤함이 연기처럼 밀려온다.

훈련소에서 들었던 노래보다 더 마음을 자극하는 노래가 있다. 처음 사귄 여자 친구와의 이별을 떠올리게 하는 한 인디밴드의 노래다. 군대 시절의 감정은 추억이라 할 수 있지만 이별은 상처에 가깝다. 아주 아팠기에 똑같은 감정은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때 이별이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 상실이라는 감정을 평생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다시 경험하려고 해도 이제 때 묻은 사회인이 되었기에 아무래도 못 느낄 거 같다. 그 나이에만 느낄 수 있는 진한 감정이 있다. 순수함으로 가득했던 그 시절,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 정도로 깊은 감정을 느낄 수 있었구나를 느꼈다. 당시에는 아팠지만 소중한 감정이다. 나도 몰랐던 마음 가장 깊숙한 곳을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친구에게 감사하다. 

매번 아프고 힘든 기억만 떠오르는 것은 아니다. 불과 몇 달 전에 다녀온 유럽 여행에서 열심히 들었던 프로미스 나인의 super sonic이 어느새 추억의 노래가 되었다. 여행을 가기 전 여행 계획을 세우던 순간의 기대. 낯선 곳을 돌아다니며 모든 것이 새로웠던 그 설렘. 그 감정들이 그대로 느껴진다.

비가 오지 않고 햇빛만 있으면 사막이 된다는 말이 있다. 2010년 중반에 방영한 드라마 '사랑해 울지마'에서 이유리가 상실감을 느끼는 이정재에게 한 말이기도 하다.

"날마다 맑은 날만 계속되면 사막이 된데요. 그런데 우린 날마다 맑은 날이었으면 하잖아요.
그리고 무서운 태풍은 깊은 바다 밑을 뒤집어서 바다를 깨끗하게 만든데요. 그러니까 오늘 맑은 날 아닌거 너무 힘들어 하지 마세요."

평생 행복이라는 감정만 느끼며 산다면 행복이 주는 특별함을 못 느끼고 삶이 건조해진다는 의미이다. 앞으로의 나의 삶에 큰 슬픔이 온다고 생각하면 무섭긴 하다. 하지만 피하지 않을 것이다. 뒤돌아보면 감정의 폭이 좁았던 시절보다 위아래로 크게 요동치던 시절들이 더 기억에 남는다. 좋았든 안 좋았든 상관없다. 진한 감정에서만 나타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으니 그저 소중하다. 그래서 앞으로 다가올 감정이 설령 안 좋은 것일지라도 외면하고 싶지않다. 피하기만 한다면 나의 삶은 파도가 치는 바다라기보다 물결 없는 호수로만 밋밋하게 남겨질 테니 말이다. 큰 파도가 온다면 올라타보려고 한다. 그리하여 내 안에 호수보다 더 큰 바다가 있다는 것을 느끼며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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