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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소심한 일탈

by jrpark91 2025. 5. 17.

회사원 E. 그는 요즘들어 무단횡단을 자주한다. 큰길은 차에 치일까 봐 무서워서 못 하고 단숨에 건널 수 있는 길에서만 한다. 작은 골목을 건널 때는 차량이 쌩쌩 달려오더라도 차보다 먼저 건너려고 한다.

원래 E는 아무리 작은 길이라도 신호는 지키는 사람이었다. TV에서 일본인들이 작은 골목에서 신호를 지키는 모습을 보며 역시 선진국은 다르다고 생각도 했었다. 한국인이 신호를 안 지키는 모습을 보면 뭐가 저리 급해서 법을 어기는지 속으로 욕하던 E. 이 모습만 보면 그는 차없는 거리에서 혼자 꿋꿋이 신호를 지키는 모범 시민이다.

그랬던 E였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다. 빨리 안 건 너냐고 빵빵대면 운전자를 한번 쏘아보고 갈길을 느긋이 간다. 작은 도로에서 차량과 동시에 마주치면 웬만하면 먼저 간다.

E는 어쩌다 이런 심보가 됐을까? 착하게 살아온 사람들이 상처받는 모습을 보면서부터다. 사내 정치 안 하고 자기 몫 이상을 해낸 E의 동료들이 회사에서 나가게 된 것이다. 규칙을 지키고 최선을 다한 그들에게 보상은 커녕 나가라고 하다니. 정직한 사람,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성공한다는 E의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무단횡단은 더 이상 E도 규칙을 지키지 않겠다는 하나의 저항이며, 소심한 E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탈이다.

E가 최근에 읽은 김영하 작가의 소설 ‘비상구’에 자기 멋대로 사는 남자 주인공이 있다. 가고 싶은 대로 발걸음을 옮기고, 운전하다 화나면 참지 않고 크락션을 울리고,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여자랑 만나고 싶으면 만나고, 헤어지고 싶으면 헤어지는 역할로 나온다.

E는 생각한다. '주인공이 사람만 죽이지 않았으면, 자기 살고 싶은 데로 원하는 것을 하며 잘 살았겠지'. '어쩌면 매일 똑같은 일상을 사는 월급쟁이들보다 더 주체적인 삶이겠다'. '규칙을 지키고 성실하게 사는것이 최선은 아니구나..' E의 머리속이 조금씩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카페에서 책을 읽고 집으로 돌아가는 , 취객 명이 인도에서 연초 담배를 풀풀 피우며 지나간다. 매운 냄새에 E 인상이 찌푸려 지지만 이상하게 옛날처럼 화나지 않는다.

'취했는데 길에서 담배 정도야...' 



에세이를 위한 허구의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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