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이 내린다. 폭설이라고 한다. 첫눈인데 폭설이라니. P가 창밖을 보며 심드렁하게 생각한다. 주변의 직원들이 창가로 몰려들어 쏟아지는 첫눈을 카메라로 담기 시작한다. P가 그 사이를 비집고 집으로 향한다.
P의 지난 일 년은 참으로 평범했다. 특별히 기쁜 일도, 나쁜 일도 없었다. 회사에서 바쁘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맡은 일을 잘 해내었으며, 퇴근길에는 동료들과 맥주 한잔을 하며 언젠가 잊힐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약속 없는 저녁에는 의무감으로 꾸역꾸역 헬스장을 들렸다. 언제부턴가 P는 공허함 비슷한 무엇인가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게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말이다.
재미없어 보이는 P의 삶 속에도 희로애락은 숨어있었다. 회사에서 맡은 일을 끝내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끌어내어 집중했으며, 동료들과 맥주 한잔을 기울이며 개발자의 미래에 대해 심히 진지한 토론도 했었다. 헬스장에서는 한 세트 한 세트 집중하며 나와의 싸움에서 이겼다는 보람을 느꼈으며, 밤공기가 차가워짐에 따라 계절의 변화를 만끽했다. 그러던 어느 겨울, 어느때 보다 차가운 밤공기를 깊게 들이마쉬던 순간 그는 느꼈다. 상쾌한 공기가 주는 희열보다 강하게 다가온 그것. 또 한살이 늘었다는 슬픔이었다.
지나가는 시간의 물결 속에서 의미를 찾고자 했던 것일까. P는 글쓰기를 시작했다. 하루하루가 똑같은 그의 삶에 쓸만한 내용이 뭐가 있겠냐 싶겠지만 오히려 그의 삶이 아주 평범한 일상으로 가득 차 있기에 그는 글을 써야만 했다. 글쓰기만이 그의 삶을 평범하지 않게 만들어주기 때문이었다. P는 그간 느꼈던 감정과 행동에서 왜 그랬는지 한 발짝 더 다가가 본다. 물결처럼 스쳐 지나가는 일상에 몸을 던진다. '아프지만 운동을 갔을 때의 보람', '앞 사람이 문을 안 잡아 줬을 때의 짜증 남', '누군가 날 향해 웃어줬을 때의 기쁨' 따위의 잊고 있었던 사소한 감정들이 떠내려가고 있다. 가라앉기 직전의 감정들을 놓치고 싶지 않아 어떻게든 팔을 뻗어 붙잡아본다.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다. 어떤 주제로 글을 쓸지 심히 고민해야 하며 주제가 정해진 다음에는 읽는 사람을 배려하며 논리적인 문단을 만들어야 한다. 문장이 너무 지루해서도 안 된다. P는 글로 먹고사는 글쟁이가 아니기에 글을 쓸 때마다 머리가 아파진다. 어떻게 보면 P에게 글쓰기는 본능을 거스르는 행위다. 지금 당장 자고 싶지만 잠을 포기하고 머리를 굴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고통은 글이 완성되면서 해결된다. P가 마지막 문단에 마침표를 찍는다. 작품 속에 또 다른 자신을 탄생시키는 순간이다. 너무나 평범해 잊고 지냈던 P의 일상이 하나의 작품이 된다. 작품 속의 P도 현재의 P도 모두 같은 P다. 마치 눈이 녹으면 물이 되고, 물이 얼면 얼음이 되듯 P는 하나이지만 여러 형태로 작품 속에서 살아 숨 쉰다.
다음 날 아침 출근길, 매번 반복되는 지루한 출근길이지만 P는 공허하지만은 않다. 오늘 또한 잊혀지겠지만 언젠가 글로서 다시 태어날 테니 말이다. 밤사이 녹아 없어진 눈이 언젠가 다시 내릴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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